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 국방군 (문단 편집) ==== 부족한 전략적 식견 ==== 독일 국방군의 전략적 식견은 매우 부족했다. 총사령관인 [[아돌프 히틀러]]의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 비효율적인 경제 운영,[* 많은 사람들의 착각과 달리 [[P-51]]이 도입되고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주야간 전략폭격을 시작한 [[1944년]] 이전까지 독일의 전시경제는 규모 면에서는 [[소련]]을 능가하고 있었음에도 이상하게 생산력은 후달릴 정도로 극히 비효율적이었다. 이는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대숙청]]을 통해 비록 병폐도 있었지만, 어쨌든 고도의 중앙집권화를 통해 집중적인 전시체제를 돌릴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나치에 부역하는 기업들이 [[정경유착]]을 통해 [[비리|뒤]]로 [[횡령|방산비리를 밥 먹듯이 해가며 서로 부정부패를 해쳐먹기]] 바빴다. 또한 에바 브라운 등의 사치품 생산에도 너무 많은 군수공장이 할당되어 있었다. 게다가 노동자 상당수를 '''그들이 지칭하는 열등인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차별받는 그들이 당연히 나치에 충성할 이유도 전혀 없는지라 군수품의 품질을 약화시키는 사보타주까지 저질렀다.'''] [[총력전]] 및 보급 체제에 대한 부족한 이해 등을 비롯하여 전투력에 반비례해 '''전략적 안목은 매우 뒤떨어지는 군대'''였다.[* 이는 동맹국인 일본과도 공유하는 문제점인데 둘 다 [[프로이센]]-[[독일제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치당 자체가 사실 기존 군사 [[엘리트]]들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였고, 히틀러 개인의 입김이 강했기에, 독일 국방군의 업무 처리는 때때로 놀랄정도로 비이성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 수많은 [[사단]]들을 무의미하게 포위섬멸당하게 한 후퇴 금지 명령이나 명백한 전투기인 Me 262를 전폭기로 사용하라고 고집한 삽질이 대표적. 오히려 일반적인 독일군의 이미지인, 기계같은 [[관료제]] 아래서 칼같이 움직이는 군대는 1차 세계대전의 독일 제국군에 보다 가깝다. 결국 독일군은 전술적인 면에서는 큰 성과를 여러 차례 거두지만 대전략적 식견에서 밀리면서 점점 전쟁에서 패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독일 국방군의 전략적인 무능함은 히틀러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제2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독일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즉, [[에리히 폰 만슈타인|국방군 수뇌부들의 잘못이 매우 컸으나]] [[하인츠 구데리안|그들은 자신의 잘못들도 히틀러에게 떠넘기며 책임을 회피했다.]] 오히려 히틀러가 더 나은 판단을 한 경우가 많다. 만약에 [[슐리펜 계획|독일 군부의 주장대로 프랑스 침공을 진행했으면]] 1차 세계대전 한번 더 재현하고 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군부가 주장한 시점(1945년)에서 전쟁을 시작했으면 재무장을 완료한 연합군에 압살 당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는 독일 군부가 군사적 문외한에게 밀릴 정도로 전략적 능력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되고, 전쟁 후기 들어서 [[테오도어 모렐]] 박사가 처방한 각종 마약에 중독된 히틀러가 수많은 전략적 실수를 저지를 때도 제대로 반박 못 하고 히틀러에게 그토록 무력하게 끌려다닌 이유도 설명이 된다. 과거에는 냉전의 영향과 수뇌부들의 변명 등이 먹혀서 이런 이미지가 덜했으나 수많은 자료와 증언들을 통해 전략적인 안목에서 독일군의 수준은 연합국에 비해 열세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연합군에 비해 독일군의 정보력이 떨어졌기에 당연한 현상이긴 하지만. 즉, ''''싸우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잘하지만 [[큰 그림]]은 거의 못 그리는 조직''''에 가까웠다. 독일이 자랑하는 장군참모 교육과정조차 독일군의 전통적인 대전략의 무지, 혹은 고의적인 무시를 잘 보여 준다. 전간기 독일군 장군참모 과정을 이수한 미육군 주재무관 아서 콩거 대령은 전략 및 전쟁사의 과목이 매우 부족하거나 아예 없어서 전략적인 관점을 전혀 익히지 못한다고 평했다. 독일 제국 시기의 [[헬무트 폰 몰트케]]에게서 비롯된 군사 이론과 교리를 변화하는 시대에서도 그대로 써먹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프랑스를 6주만에 밀어버리고 독소전쟁 초기 남부전선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절망적인 상황을 반전]]시키는 등 전술적인 능력으로는 천재적인 장군이었지만 큰 피해를 입어도 중앙집권화된 총력전체제로 금방 전력을 복구하는 [[소련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에는 실패했고 전선안정화에만 급급해했고 전쟁 말기까지도 전략, 정치적 영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눈앞의 적을 막는데만 매달렸다. 한 번은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야심차게 [[성채 작전]]을 계획했지만 막상 만슈타인의 생각과 달리 독일의 전차 생산량은 이를 따라가질 못했고 오히려 성채 작전을 연기한 '''히틀러의 판단이 옳았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도 있을 정도이다.[* 참고로 [[성채 작전]]은 [[발터 모델]] 등 다른 국방군의 장군들도 극구 반대한 사안이었다. 한마디로 [[에리히 폰 만슈타인|만슈타인]]은 [[아돌프 히틀러|총통]]에게 잘 보이는 데에만 치중했다는 것이다. [[하인츠 구데리안]] 역시 회고록에서 [[에리히 폰 만슈타인|만슈타인]]은 [[아돌프 히틀러|히틀러]]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모습만 보인다고 돌려까기식으로 비판하고 비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